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에너지저장시스템(ESS) 시장의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25년 약 485TWh에서 2030년 약 950TWh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저장 기술로 리튬이온 배터리가 현재 에너지저장시스템 시장의 약 80~90%를 점유하고 있지만, 화재·폭발 위험과 자원 편중, 환경 오염 문제가 꾸준히 지적돼왔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통상적인 전력 유지 시간이 4시간에 그치는 점도 안정적 전력 공급을 요구하는 AI 데이터센터에는 한계로 작용한다. 이런 배경에서 화재 위험이 낮은 물 기반 비리튬 배터리 기술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미국의 폼에너지와 에오스 에너지 엔터프라이즈, 한국의 코스모스랩이 각기 다른 소재와 전략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장주기 저장과 인프라 확장을 노리는 흐름
MIT 스핀아웃 스타트업인 폼에너지는 철-공기 배터리로 최대 100시간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LDES)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테슬라 에너지 저장 부문 부사장을 지낸 마테오 하라미요와 MIT 배터리 과학자 예밍 치앙이 공동설립한 이 회사는 지난 8월 시리즈G 투자로 약 1조 원(7억 5,000만 달러)을 유치했으며, 투자자로는 빌 게이츠가 조성한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와 시쿼야 캐피탈 등이 참여했다. 지난 3월에는 AI 인프라 기업 크루소와 총 12GWh 규모의 LDES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전력 인프라 기업으로 사업모델을 확장하는 중이다. 폼에너지가 사용하는 철 소재의 약 80%는 미국 내에서 조달되고 나머지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들여온다.
나스닥에 상장된 에오스 에너지 엔터프라이즈는 수계 아연-브롬 배터리 상용화에 성공해 4~16시간급 저장 시간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사모펀드 서베러스와 함께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 프로젝트 개발·자금조달·운영을 담당하는 법인 프론티어 파워 USA를 설립해 수직계열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현장에 발전 설비를 설치해주는 터빈엑스 에너지와 협력해 향후 36개월간 최대 2GWh 규모 적용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저장 시간대와 사업모델은 다르지만 폼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전력 인프라 영역으로 보폭을 넓히는 방향이 공통적이다.
소재 다변화와 해외 제휴로 승부하는 흐름
2021년 설립된 한국 스타트업 코스모스랩은 물 기반 아연-할로겐 배터리를 개발하며 일체형 셀 구조로 소형화한 기술을 앞세우고 있다.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 박사이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구원 출신인 이주혁 대표와 카이스트 석·박사 출신 조인성 공동대표가 이끄는 이 회사는 지난 8월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시리즈A로 220억 원을 유치했다. 코스모스랩은 일본 소프트뱅크와 배터리 셀 공동 개발·양산을 위한 전략적 제휴를 맺고 2027년 GWh급 공동 양산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코스모스랩은 차세대 개념의 배터리 기술로서 실효성 문제는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한 상용화의 관문
세 기업 모두 물 기반 비리튬 소재로 리튬이온 배터리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원료와 저장 시간대는 서로 다르다. 철-공기, 아연-브롬, 아연-할로겐이라는 상이한 화학적 접근과 전력 인프라 확장, 수직계열화, 해외 제휴라는 각기 다른 사업 전략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비리튬 배터리 상용화의 핵심 관문이 기술력보다 양산 수율·원가·설치면적 확보에 있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열폭주 발생 시 화재·열 전파를 평가하는 미국 국가 표준 시험인 UL 9540A와 미국 전기전자공학회의 분산에너지자원 계통연계 기준인 IEEE 1547 등 시장별 안전·계통연계 규정을 충족하는 것도 관문으로 꼽힌다.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전력량이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비리튬 배터리 기술이 실제 상용화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소재 혁신을 넘어선 생산·규제 대응 역량이 함께 검증돼야 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