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헬스케어 산업에서 AI를 둘러싼 관심의 축이 옮겨가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간 헬스케어 콘퍼런스(JPMHC)와 JP모간의 2026 헬스케어 전망에 따르면, 자본과 산업의 시선은 더 이상 AI 기술 자체가 아니라 신약개발·임상·의료행정 등 실제 산업 적용과 데이터·워크플로 통합으로 향하고 있다. JPMHC 2026의 핵심 키워드로 AI가 다시 꼽혔지만, 그 의미는 지난 몇 년과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엔비디아(NVIDIA)와 일라이 릴리(Eli Lilly)의 협력이다. 두 회사는 향후 5년간 최대 10억달러(약 1조 4,000억 원) 규모의 공동투자를 통해 AI·자동화·로보틱스를 신약개발에 연결하는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AI를 신약개발 파이프라인 전체에 통합하려는 산업적 시도로 해석된다.

데이터와 워크플로 통합이 경쟁력의 축
JP모간이 짚은 또 하나의 흐름은 의료 AI 경쟁력의 무게중심이 단일 모델 성능에서 데이터 확보와 의료 워크플로 통합 능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 바이오네모(BioNeMo) 등이 언급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바이오 AI 경쟁이 개별 모델의 성능 경쟁을 넘어 신약개발 전체 파이프라인의 효율화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국내 헬스테크 스타트업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예지엑스(Yeji X)는 멀티모달 AI로 심부전 재입원 위험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카카오벤처스와 슈미트로부터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이후 글로벌 팁스(TIPS)에 선정되며 미국 법인을 설립해 현지 진출을 본격화했다.
신약개발과 진단, 각기 다른 갈래의 AI 적용
애스톤사이언스(Aston Science)는 AI와 면역학을 결합한 맞춤형 암 백신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PAVE’에 선정됐고, 올해 6월에는 위암 백신이 FDA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됐다. 신약개발 단계에서부터 AI를 접목해 파이프라인 전체를 재설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노을(Noul)은 현장진단 자동화 플랫폼 miLab CER을 통해 유럽과 중남미 시장에 진출했다. 올해 6월 ‘글로벌 강소기업 1000+ 프로젝트’에 선정되며 성장 발판을 넓혔다. 진단 영역에서의 AI 적용은 신약개발과는 다른 갈래지만, 현지 의료 시스템과 규제를 고려한 초기 기술 설계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정부 지원 프로그램의 역할과 남은 과제
글로벌 사업화를 위한 초기 기술 설계는 이제 필수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다. 데이터 인프라 구축, AI 신약개발 플랫폼, 그리고 처음부터 현지 의료 시스템과 규제를 반영한 설계가 산업 적용의 성패를 가른다는 것이 이번 흐름의 공통된 시사점이다.
이 과정에서 중소벤처기업부의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DIPS), 글로벌 팁스, 글로벌 강소기업 1000+ 프로젝트 등 정부 지원은 기술창업 단계를 넘어 스케일업과 해외진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만 현지 임상검증과 규제 대응 등에서는 여전히 구체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JPMHC가 조명한 흐름은 AI가 얼마나 정교한 기술을 갖췄느냐보다, 그 기술이 실제 의료 현장과 시장에 어떻게 스며드는지가 관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