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는 약 10년마다 판을 바꾸는 큰 흐름을 겪어왔다. 온라인이 첫 파도였고 모바일이 두 번째였다면, 지금은 생성형 AI가 세 번째 파도로 지목된다. 개발비 증가와 개발 기간 장기화로 실험적 시도가 줄고 기존 성공작을 모방하는 웰메이드 경쟁이 굳어진 상황에서, AI가 이 악순환을 끊을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진단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2023년 6월 설립된 앵커노드의 원재호 대표는 26년간 게임 개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퀴즈퀴즈’, ‘피파온라인2’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생성형 AI를 접하며 이번 변화의 크기를 가늠했다. 그는 “2023년 생성형 AI를 보면서 ‘이건 인터넷이 게임에 접목되던 때보다 더 큰 변화’라고 직감했어요. 이번 파도는 게임 개발을 사람 손의 한계에서 해방시킬 것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웰메이드 경쟁의 악순환, 생산성 혁신이 답이다
게임 제작비가 커질수록 프로젝트는 실패를 감당하지 못해 안전한 선택으로 몰린다. 원 대표는 “게임개발 프로젝트는 투입자본이 커질수록 더 소극적이고 안전한 방향을 추구하게 됩니다. 게임업계의 기존 성공작을 모방한 웰메이드 경쟁은 사람을 더 많이 갈아 넣으며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하는 악순환을 불러왔어요. 이 문제는 대규모의 생산성 혁신이 있어야 풀 수 있는데, 생성형 AI를 접하며 이것이 그 해답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이 진단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앵커노드가 만든 캐릭터 제작 기간은 620일에서 30일로 줄었고, 한 도시건설 게임에서는 10명이 1년 가까이 걸릴 그래픽 작업을 1명이 6일 만에 끝냈다. RPG 게임 물량은 전통 방식으로 2년이 걸리던 것을 동일 인원이 5주 만에 완성했고, 일부 작업은 생산성이 최대 300배까지 향상됐다. 반복적인 리소스 제작 영역에서 AI가 사람의 시간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직접 만들고 솔루션에 쌓는 선순환 구조
앵커노드는 이 흐름을 에픽게임즈를 롤모델 삼아 구조화했다. 게임 개발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 AI 기술을 익혀 직접 게임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검증한 기술을 AI 게임 제작 솔루션 ‘GameAIfy’에 축적하는 방식이다. 원 대표는 “실제 게임을 만들며 얻은 기술이 솔루션에 쌓이고, 강해진 솔루션이 다시 게임 개발을 앞당기는 선순환이 저희의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라고 밝혔다.
창업 2년여간 상용 게임 9종을 출시하며 누적 매출 18억 원을 넘겼고, 올해 목표 매출은 20억 원이다. 2024년 초 퓨처플레이의 시드 투자를 받았고 지난해 초 퓨처플레이·네이버 D2SF의 프리A 라운드를 거쳐 누적 투자유치액 25억 원, 기업가치 300억 원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코어 이노베이션 코리아 최우수상과 아시아 AI 대상을 수상했고, 미국 GDC에 단독 부스로 참가했다. 올해는 도쿄게임쇼에도 단독 부스로 나설 예정이다. 임직원 25명 규모의 조직이 이런 성과를 내는 배경에는 원 대표가 말한 조직론이 있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작은 팀의 과감한 도전이 큰 성과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봐 왔다”며 “앵커노드는 소수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공대’ 같은 조직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몫으로 남는 재미, 그리고 게임계 르네상스
AI가 반복 작업을 대신한다고 해서 사람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원 대표는 “AI를 쓸수록 단순한 작업은 줄어들지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은 오히려 늘어나요. 특히 게임의 개성과 재미는 끝까지 사람의 몫으로 남을 겁니다. AI는 정답이 있는 문제에 강한데, 여기엔 정답이 없기 때문이죠.”라고 짚었다. “AI가 게임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꿔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 변화가 향하는 방향을 원 대표는 ‘게임계 르네상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아주 작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딱 맞는 게임들이 쏟아지고, 그중 일부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할 성공을 거두는 세상, 그것이 ‘게임계 르네상스’입니다.”라고 말했다. 유튜브가 방송시장을 바꾼 것처럼, 소수의 팬만으로도 창작자가 성립할 수 있는 생태계가 게임 산업에도 열릴 수 있다는 시각이다.

산업 전체에 필요한 조건
이런 흐름이 개별 기업의 성공 사례로 끝나지 않으려면 산업 차원의 조건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 대표는 “실패해도 도전할 수 있는 안전망, 새로운 시도를 지원하는 투자, 그리고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것을 꿈꾸고 설계하는 크리에이터를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도전을 감당할 안전망과 다양성을 뒷받침할 투자, 창작자를 키우는 교육이 맞물려야 산업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원 대표는 자신의 커리어 초반 경험을 이번 파도에 대한 기대와 연결했다. 그는 “커리어 초반, 단 두 명이 시작한 게임이 전 세계 게임 역사를 바꾼 걸 지켜봤어요. 그때 우리나라는 온라인 게임의 종주국이었죠. 26년이 지난 지금, 이번엔 AI로 한국 게임이 다시 세계 최고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지금도 현장에서 일하는 개발자이고, 끝까지 직접 만들면서 그 장면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온라인 게임 종주국의 경험을 가진 한국 게임산업이 AI라는 세 번째 파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는, 앵커노드를 비롯한 현장 개발자들의 다음 시도들이 답을 만들어갈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