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청정 시장의 오랜 전제는 ‘필터가 오염물질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붙잡아 두느냐’였다. 오염이 심한 환경일수록 필터가 빨리 막히고 교체 주기가 짧아지는 구조적 한계는 헤파(HEPA) 필터 중심 산업 전반이 안고 있던 문제였다. 이 지점을 공략해 물로 공기를 세척하는 방식을 들고나온 곳이 워터베이션이다. 정윤영 대표가 개발한 WVG(Water Volume Grid) 공법은 물을 미세 입자로 분사해 공기 중 오염물질을 포집한 뒤, 오염된 물을 버리고 새 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필터 교체·관리 부담 자체를 없애는 접근이다.
정 대표는 “공기가 좋지 않은 환경일수록 필터 관리가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지를 계속 필터 안에 쌓아두기보다 비가 공기를 씻어내듯 물로 관리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개발 배경을 설명했다. 비가 온 뒤 공기가 맑아지는 자연 현상을 기술로 옮긴 셈이다.

해외 검증 먼저, 국내 출시는 그다음
워터베이션은 국내 출시에 앞서 미국 킥스타터를 통해 해외 시장의 반응을 먼저 확인하는 경로를 택했다. 인지도 없는 한국 스타트업의 신개념 제품을 해외 소비자가 온라인에서 구매까지 이어갈지는 검증되지 않은 변수였다. 정 대표는 “기술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지도 없는 한국 스타트업 제품을 해외 소비자가 온라인에서 선뜻 구매할지, 필터 대신 물로 공기를 씻는 새로운 개념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내부적으로도 긴장감이 컸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결과적으로 이 캠페인은 약 54만 달러(약 7억 원) 규모의 펀딩으로 마무리됐다. 해외 소비자가 필터 없는 물 기반 공기정화라는 낯선 개념에 실제 지갑을 열었다는 점에서, 신생 카테고리가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근거를 스타트업 스스로 만들어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검증을 발판 삼아 워터베이션은 큐(CUE) 에어워셔를 2026년 9월 국내에 출시할 예정이며, 이를 위한 자체 생산라인 구축도 준비하고 있다.

기존 필터 시장과의 관계 설정
물 기반 공기정화가 시장에 자리 잡으려면 헤파필터로 대표되는 기존 방식과의 관계 설정이 관건이다. 워터베이션은 이를 경쟁이 아닌 상호보완적 선택지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정 대표는 “헤파필터가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 있습니다. 워터베이션은 기존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활용한 또 하나의 공기 관리 방식을 제안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기술 구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지점은 물과 공기가 충분히 접촉하도록 만드는 구조 설계였다. 정 대표는 “기술의 핵심은 작은 힘으로도 물을 안정적으로 미세 분사하는 것입니다. 물과 공기가 충분히 만나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가정용 제품에 우선 적용된 이 기술은 주방후드, HVAC, 스마트빌딩, 반도체 집진장치 등 산업용 설비로 적용 범위를 넓혀가는 단계에 있다.
ESG 데이터로 이어지는 확장 전략
산업용 확장과 맞물려 워터베이션이 주목하는 또 다른 축은 필터 폐기물 감소 효과를 데이터로 축적하는 작업이다. 정 대표는 “얼마나 많은 필터를 줄였고, 그 결과 어떤 환경적 효과를 만들었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제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과 공공기관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공기를 관리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필터 관리 부담이 클수록 물 기반 방식의 효용이 커진다는 점에서, 산업 현장은 워터베이션이 데이터 기반 근거를 축적하기에 적합한 무대다. 헤파필터와의 시장 포지셔닝 비교가 가정용 소비재 단계를 넘어 산업 현장의 실질 수요로 이어질지가, 이 새로운 에어테크 카테고리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을지를 가늠하는 다음 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