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성 소재 산업에서 오랫동안 굳어진 공식이 있었다. 연구소가 먼저 좋은 소재를 만들고, 그 다음 시장에서 소비자를 찾는 방식이다. 이 구조에서는 자체 연구소를 갖춘 대기업만 소재 개발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원물을 생산하는 농가나 작은 브랜드는 부가가치의 끝단에 머물렀다. 식물성 콜라겐 펩타이드 VC-H1을 상용화한 로가는 이 순서를 뒤집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하경수 로가 공동대표는 “지금까지는 연구실에서 좋은 소재를 만든 뒤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를 찾는 방식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시장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기능을 먼저 확인하고 그 수요에 맞는 천연물 소재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소재 개발의 출발점을 기술이 아니라 고객에게 두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원물 가치와 부가가치 불균형
로가는 2017년 라오스 유기농 농장에서 히비스커스 재배를 시작했다. 원물이 가진 가치에 비해 생산자가 얻는 부가가치가 낮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결정이었다. 2019년 히비스커스에서 식물성 소재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2년간의 연구 끝에 2021년 제조 기술과 원물에 관한 특허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로가는 재배 단계부터 공급망을 직접 관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 대표는 “좋은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바이오 소재도 같습니다. 산업의 효율성만 따지면 직접 농사를 짓는 방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원물과 공급망을 직접 관리해야 기술과 품질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제 안에 남아 있는 농사꾼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원물 확보 전략은 이후 소재 개발 전반의 신뢰도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됐다.
시장 수요를 먼저 읽는 개발 구조
로가는 히비스커스에서 확인한 기술을 다른 천연물로 확장하는 단계에 있다. 하 대표는 “로가가 식물성 콜라겐 회사로 출발한 것은 맞지만 그게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히비스커스에서 확인한 기술을 다른 천연물에 적용하고, 각 소재에서 더 신뢰도 높은 유효 성분을 찾아내는 것이 지금의 로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확장의 중심에는 AI 기반 신소재 개발 플랫폼 바이오파운드라(BioFoundra)가 있다.
바이오파운드라는 시장 수요를 먼저 분석한 뒤 AI로 적합한 천연물·펩타이드 후보를 탐색하고, 가상 환경에서 분자구조와 효능을 검토한 다음 실험·생산·인체적용시험·글로벌 판매로 이어지는 구조로 작동한다. 소재 개발의 순서를 기술에서 고객으로 옮긴 것이 이 플랫폼의 핵심이다. 로가는 2022년 프랑스 시알 파리(SIAL Paris)에서 원료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이 방식의 성과를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고, 2025년 매출 300억원을 넘겼다.
작은 브랜드에도 열리는 R&D
로가가 겨냥하는 다음 흐름은 연구개발 접근성의 확장이다. 하 대표는 “아무리 작은 브랜드도 자신만의 콘셉트와 원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R&D는 대기업의 전유물에 가까웠어요. 자체 연구소가 없는 브랜드에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원료를 개발할 수 있는 연구실을 제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체 연구소 없이도 원료 개발에 나설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현재 B2B 고객을 중심으로 실행되고 있다. 하 대표는 “지금은 기술과 생산 능력, 신뢰를 더 쌓아야 하므로 B2B 고객부터 지원하고 있습니다. 작은 브랜드가 자체 R&D를 주도할 수 있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갈 계획입니다”라고 밝혔다. 로가는 2026년 5월 KB인베스트먼트로부터 155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하며 이 계획을 뒷받침할 자금을 확보했다. 청주 제1공장에 이어 세종 제2공장을 건설 중이며, 9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데모데이에 참가한 바 있다.
개인 맞춤형으로 향하는 로드맵
B2B 중심 전략의 다음 단계로 로가가 그리는 그림은 개인 맞춤형 플랫폼이다. 하 대표는 “로가가 식물성 콜라겐 회사로 출발한 것은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성분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회사가 좋다고 주장하는 제품보다 본인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시장 수요를 먼저 읽는 개발 구조가 결국 개인 단위의 수요까지 대응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기능성 소재 산업이 오랫동안 대기업 연구소와 소수 원료 회사 중심으로 움직여왔다면, 로가가 보여주는 흐름은 원물 생산자와 소규모 브랜드까지 개발 주체로 끌어들이는 쪽에 가깝다. 시장 수요를 먼저 확인하고 AI로 소재를 설계한 뒤 생산으로 연결하는 구조가 이 업계에서 얼마나 확산될지가 다음 단계의 관전 포인트다.